올해도 예외 없이 00녀가 등장했고, 역시 지하철 시비가 발단이 됐다. 그 유명한 개똥녀로 부터 시작해서 목도리녀, 노량진녀, 고대녀에 이어 지하철 막말녀 까지, 때로는 문제아로 때로는 개념녀로 우리 사회는 여성들을 아주 쉽게 대상화 한다. 그 시비의 질과 내용은 사실 흔히 일어나는 것들 이었지만 이것이 00녀라는이틀을 얻는 순간, 아주 특별하고 특이한 사회적 현상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따라서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지를 따지기 이전에 우리가 품어야 할 의문이 몇 가지 있다.
첫번째 의문은 이것이다. 왜 여성은 개념녀 아니면 문제아로 비춰지는가. 여성을 창녀 아니면 성모 마리아나 어머니로 대하는 것은 전형적인 남성 우위 사회의 모습은 아닌가. 이런 사회에서 여성은 주체가 아니라 평가의 대상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00녀 사건들은 정말 이런 현실의 표현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두번째로는 미디어의 역할이다. 이제 인터넷이란 공간은 온갖 정보가 흘러다니는 바다가 되었다. 이 흐름 속에서 미디어는 정보를 창출하는 것으로 부터 수집하고 가공하는 역할로 중심 이동을 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이동이 잘 이뤄지고 있는 것일까? 개인간의 사소한 마찰을 집어 내어 확대 재생산 하는 이 분위기는 정보 가치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업적 욕망에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 클릭수를 늘리기 위해 문제를 창조해 내고 있다는 말이다.
세번째는 대중의 태도다. 시비를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보다는 사진이나 동영상 부터 촬영하고 이를 인터넷에 공개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적극적 시민이 아니라 업로더로 존재하는 것은 감정적, 육체적 손실을 회피하면서도 존재감을 만족 시킬 수 있는 편리한 방법이며, 이를 지켜 보며 개탄하거나 옹호하며 갑론을박 하는 것은 일종의 대중 놀이가 되어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갈등의 전후 사정과 배경이 생략되고 어떤 소재로만 존재하게 될 때,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00녀 시비로 달아 오른 인터넷 공간을 들여다 보며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 단상에도 올라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던 프랑스 혁명의 여주인공 올랭드 드 구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사회의 시민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 시민권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인지 그 자신을 단두대에 바친 이 여성 운동가를 통해 여실히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00녀가 존재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그것은 00남이 져야 할 책임까지 여성에게 덮어 씌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부의 갈등을 성찰하고 해결하려 투쟁하기 보다는 누군가를 희생 시키는 것으로 대신 하려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00녀 문화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FTA 저지 투쟁 만큼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1. 우연히 박노해의 글을 읽는 친구에게..”야!” 너는 신학생이 저런 공산주의자의 글을 읽으면 되냐”고 했다가 의절할 뻔한 기억이 새롭다. 박노해가 막 출옥했을 무렵에,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박노해의 원래 사상적 입장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은 나 혼자 뿐이었고 그만큼 그를 싫어 했다. 그가 수감 생활을 하면서 내놓은 도통한 듯한 태도들을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었던 것. 한때 그가 이끌었던 사노맹 조직원들이 그토록 비판을 받으면서도 - 심지어는 운동권 안에서도 - 어떻게 살았는지 알기에 통렬한 반성이나 제대로된 사과도 없이 갑자기 뭔가를 깨친 듯한 그의 변화를 도저히 납득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저 변절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2. 마찬가지로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을 읽고 느꼈던 황당함도 잊을 수가 없다. 그당시만해도 작가라면 자존심과 긍지로 산다고 믿었던 내게 정교하게 기획된 듯한 이 책의 묘사들이 너무 상업적이라고 느껴졌던 것. 부실한 내용으로 화려한 마케팅을 하는 것을 과연 작가가 용납했을 것인지 무척이나 의아했었다.
3. 비록 대면한 적도 없고 나같은 독자 때문에 상처 받았을리도 없지만 그래도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박노해는 그 후로도 몇번 실수를 했던 것으로 알지만 최소한 자신의 명망을 팔아서 할 수 있는 더 많은 유혹들로 부터 스스로를 지켜냈고, 공지영의 이후 작품과 활동은 충분히 존중 받을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4. 이렇게 삶은 복잡한 것이고, 사람은 저마다의 결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지사의 삶을 사는 사람이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 말 없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너는 왜 부끄러워 하지 않느냐고 다그친다면? 각자의 이유가 변절이나 부역의 변명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그냥 밟는 것 만이 최선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카뮈가 되고 싶어하고 그것이 인기 있는 시절에 누군가는 모리악의 역할을 맡아야 하는 법이다.
반갑긴 뭐가~ 공주 좀 하겠다고 샀는데 뒷 부분은 소니 제품 홍보..아니나 다를까..12월 부터 소니 제품 사면 공짜로 준다고..규탄한다! (Taken with instagram)
아이폰 자동 노출-초점 고정 기능을 쓰면 이런 상황에서도 사진이 잘 나온다는데..어떻게 하는 건지 감이 아직도 잘.. (Taken with instagram)
이슬람 사원에 갔다가 사진만 찍고 오는 것은 예의가 아닐듯 해서
팜플렛 몇 가지를 주워왔다.
전반적으로 아는 내용들이었고…
이슬람이 엄한 나라에 들어와서 별걸 다 해명해야 하는 구나 하는
안타까움이 들기도 했지만
(돼지고기! 나는 좋아하지만 안 먹으면 그만이지
그걸 해명까지 해야 하다니..ㅠㅠ)
히잡에 대한 언급은 몇번을 읽어도 그다지 동의할 수가 없었다.
대체로 고래 종교들이 아름다운 말들로 주장하는 여성에 대한 보호와 존중은
그 선의를 믿는다 해도 그저 ‘주어진 것’들일 뿐이다.
지금에 이르러 여성, 아니 인간의 기본적 권리로 확인된 선택의 권리
능동적 주체가 될 권리와 ‘강요된’ 히잡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이슬람의 숙제일 뿐만 아니라 비슷한 도전을 받고 있는
종교와 문화들의 과제이기도 하리라.
3. 지지자를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이 국민을 돌본다고?
노회찬이 전 정권의 공과를 묻는 이들을 비판 하기 위해 사용한 레토릭은 명확히, 그와 그를 방어하던 이들을 모욕하고 조롱하던 논리와 판박이 처럼 닮아 있다. 쥐만 잡으면 되지 진정한 쥐약이 뭔지 다툴 필요가 있느냐는 그 점잖은 훈계는 MB 정권을 종식할 수만 있다면 누가 진정한 진보 후보인지를 따질 이유가 뭐냐는 물음과 겹쳐진다. 노회찬의 생각이 변했다면 그것도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할 것이고 자신이 당했던 그 모든 부당한 공격과 비난을 잊을 수 있다면 그의 넓은 도량에 존경을 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들었던 그 깃발을 함께 지키며 모욕 받았던 이들, 그리고 여전히 그 깃발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팽개칠 수는 없다. 자신이 주장했던 길로 함께 나섰던 이들을 버리고 국민의 여망에 따른다고? 그게 가능할까.
4. 착한 FTA론은 누구의 것인가
착한 FTA론 자체가 좌파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 모든 독소 조항이 폐지되고 유시민이 말하는 이익균형이 실현되는 착한 FTA가 가능해 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래도 좌파의 입장은 반대여야 하지 않는가.
근본적으로 비교우위설에 기반한 자유 무역은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을 전제로 한다. 노무현의 그 착한 FTA에 왜 좌파가 반대 했었나. 이윤 보다 사람을..그것이 단 한 사람일지라도, 사람을 선택하자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물론 잘못 알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착한 FTA가 성사되었을 때, 반대 전선에서 노회찬을 볼 수 없다면 아마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해 질 것이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착한 FTA론을 비판하고 노무현의 책임을 묻는 것은 이러한 진보 세력의 관점을 드러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합 협력의 출발이 될 것이기에.
5. 다른 것을 다르다고 말할 자유를 위해
진영의 이익과 대동단결을 위해 닥치고 단결하자는 주장을 진보 정치인의 입에서 듣게 될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 아마 지금이 전시라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좌파는 설령 전시라 할지라도 다르게 말할 자유를 방어해야 한다.
주사파 양심과 표현의 자유 마저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보 정치 세력이 우리가 함께 싸우지만 싸우는 이유가 다르다는 점은 분명히 하자는 표현 자체를 반대할 수 있을까. 정치적 미래가 불투명하고 사회적 논란이 극심한 사안일 수록 그 누구라도 두려움 없이 자신의 주장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양보나 유예가 불가능한 대원칙이다. 그 평가는 공론의 장에서 내려질 것이고. 실제로 지금이 전시라면 사소한 불평과 불만 쯤이야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테니 금방 뭍혀 버리고 말 것 아닌가.
7. 나가며
제도와 구조를 보지 사람을 봐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사람이 20여년간 지지해 왔던 정치인이라면 다른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을 믿어서는 안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거듭 확인하기 위해 너무나 값비싼 댓가를 치룬 주말이었다.
트위터를 시작했을 때, 궂이 찾아서 팔로어 했던 인물이 노회찬이었다. 이 공간에서 처음으로 정치적인 사유로 격하게 충돌했던 것도 노회찬 때문이었다. 조선일보 행사장에간 노회찬을 비웃는 민노당 부대변인에게 반박했던 것.
이렇게 진보정당, 아니 진보신당 당원과 지지자들은 노회찬에 대한 부채감을 갖고 있다. 인물이 아니라 조직을, 바람이 아니라 당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노회찬이라는 이름 석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마음으로 아는 것이다. 특히 당의 결정에 따라 시장 선거를 끝내 완주하면서 자신의 지지 기반 상당 부분을 잠식 당하는 모습을 지켜 봤던 이들은 분당 정국에서도 차마 노회찬을 향해 돌을 들지 못해다.
그런 이름 석자를 오늘로 탄핵한다.
1. 시작은 중요하지 않다.
쥐약의 제조국이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그뿐만 아니라 FTA의 길로 들어 섰다는 이유로 노무현을 비판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다. 좌파, 진보 정치인이 아니었던 노무현에게 당시의 경제 상황을 돌파할 선택지로 매력적이었을 FTA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가혹하며 쓸모 없는 일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로 나는 노무현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세력에게 회개를 강요하는 것에도 반대하며 이광재, 문재인, 안희정씨가 간간히 드러내는 일관성에 대해 기꺼운 마음으로 존중과 존경을 보낸다.
2. 그러나 사실은 중요하다.
시작은 중요하지 않지만 사실을 사실 그대로 남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혹은 성공의 열매를 제대로 분배하기 위해서 결코 양보해서는 안될 원칙이다. 노무현의 FTA를 거듭 거론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그와 그의 지지세력을 비웃거나 그들 보나 우리가 얼마나 잘나는지를 드러내려는 일이 아니다. 다. 국가나 민족이나 기업이나 진영에 대한 충성 보다 건조하고 때로는 처절한 사실 그 자체에 대한 충성이야 말로 좌파의 기본 태도여야 마땅하지 않은가? 사실은 사실 그대로 기록되어야 한다.
시작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바츨라프 하벨
일단 내가 시작해야 하리, 해보아야 하리.
여기서 지금,바로 내가 있는 곳에서,
다른 어디서라면일이 더 쉬웠을 거라고자
신에게 핑계 대지 않으면서,
장황한 연설이나과장된 몸짓 없이,
다만 보다 더 지속적으로
나 자신의 내면에서 알고 있는존재의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어 살고자 한다면.
시작하자마자나는 홀연히 알게 되리
놀랍게도내가 유일한 사람도첫 사람도
혹은 가장 중요한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그 길을 떠난 사람 가운데에서
모두가 정말로 길을 잃을지 아닐지는
전적으로내가 길을 잃을지 아닐지에 달렸다는 것을.
우리가 환한 아름다운 대낮에 행진, 행진을 하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컴컴한 부엌과 쟂빛 공장 다락이
갑작스런 태양이 드러낸 광채를 받았네.
사람들이 우리가 노래하는 “빵과 장미를, 빵과 장미를”을 들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행진하고 또 행진할 땐 남자를 위해서도 싸우네,
왜냐하면 남자는 여성의 자식이고, 우린 그들을 다시 돌보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린 착취당하지 말아야만 하는데,
마음과 몸이 모두 굶주리네: 빵을 달라, 장미를 달라.
우리가 행진하고 행진할 때 수많은 여성이 죽어갔네,
그 옛날 빵을 달라던 여성들의 노래로 울부짖으며,
고된 노동을 하는 여성의 영혼은 예술과 사랑과 아름다움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 우리가 싸우는 것은 빵을 위한 것 - 또 장미를 위해 싸우기도 하지.
우리들이 행진을 계속하기에 위대한 날들이 온다네—
여성이 떨쳐 일어서면 인류가 떨쳐 일어서는 것—
한 사람의 안락을 위해 열 사람이 혹사당하는 고된 노동과 게으름이 더 이상 없네.
그러나 삶의 영광을 함께 나누네: 빵과 장미를 빵과 장미를 함께 나누네.
(시 번역: 진영종 성공회대 교수)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90
근본적으로 창작물은 사회적 산물이다.
특히 교회 안에서 탄생하는 각종 저작과 예술품, 성음악은
전수된 신앙과 그것을 유지하는 공동체와 무관할 수 없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창작자의 생계를 보장하고
자부심과 명예를 지켜 주지 않는다면 교회 예술의 질적 성장이
이뤄질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하다.
복제 성화상의 무분별한 유통이 가져온 어려움이나
생활성가 운동이 겪는 문제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대체로 나는 지적 생산의 공공성을 더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것이 넘치도록 보장 혹은 남용 되어 온 교회 안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는
저작권자에 대한 정당한 보호와 대우가 우선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여건이 허락 되는 곳이라면 이런 저작권 문제 뿐만 아니라
성가대 지휘자나 주일학교 스텝 등의 활동까지도
유급 직원을 두기를 원한다.
봉사는 아름다운 일이지만,
가끔 봉사에 중독된 듯한 모습 들을 걱정되기 때문이고
사람을 돕고 키우는 일이야 말로 미래에 대한
가장 합리적 대비가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